_/읽다가

조선 왕릉 잠들지 못하는 역사

hkwu 2010. 2. 15. 22:58

 

이우상 글(asdfsang@hanmail.net), 최진연  사진(cnnphoto@naver.com), 다ㅎㆍㄹ미디어(다할미디어임--; http://www.dahal.co.kr), 2009, 2권.

 

얼마 전에 DMB 돌리다가 뒷 부분 15분을 보게 된 다큐 프로그램 내용이 조선의 왕릉 택지에 관한 것이었다.

정확히는, 서초구 내곡동 헌릉(태조와 원경왕후 민씨 능) 곁에 자리 잡아둔 세종의 영릉 터가 불길하다고 풍수 최양선이 여러 번 소를 올렸다는 건데

그 내용이 그 자리는 주혈이 아니라 곁가지인데다 주인과 손님이 다투는 상이고, 맏아들을 잃고 손이 끊기는 형세라는 거.

근데 문종과 단종도 그렇고, 안평대군과 금성대군은 동복형 세조에게 죽었고, 세조 아들 덕종 의경세자와 예종은 19세, 예종 아들 인성대군 3세에 돌아가셨다고.

뭔가 있어보이잖소. 영릉은 예종 1년에 지금의 경기 여주군 능서면으로 이장했대는데 이 자리가 그리 명당이래는데. 

암튼 이 다큐 제목도 확인 못하고 해서, 분명 책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찾아야지 하고 갔다가, 서가에 꽃힌 걸 딱 발견해버렸다.ㅎㅎ

 

 

글은 간결하면서 일견 시적이고, 사진은 선명하고 밝고 시야가 너른 것이 참 좋다.

1권 17쪽에는 조선 왕릉 분포를 보여주는 간단한 지도, 21쪽부터는 일람표, 261쪽에는 왕 연대표가 있다.

24~26쪽의 능 상설도와 설명을 보면 무덤 주변에 있는 담장, 장식물(?), 기둥, 건물 등이 무슨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싹 정리해줘서 좋다.

 

조선의 왕 중 가장 풍수에 밝았고, 일생을 거쳐 가장 많은 왕릉 터를 찾아 헤맨 세조는

아버지 세종, 형 문종, 큰 아들 추존왕 덕종(의경세자), 둘째 며느리인 예종 원비 장순왕후 한씨(한명회의 3녀)의 장지를 잡았는데,

세조의 풍수가로서의 가장 큰 활약(?)은 문종의 능 터 잘 잡아놓은 국풍 최양선 유배, 지관 목호지 노비로, 지관 이현로는 역적이라고 처형한 후

직접 용이 죽고 명이 끊긴다는 대흉의 터에 형을 묻은 데 있다고 본다. 흥.

 

태조, 세종, 중종, 선조, 영조, 정조가 풍수에 조예가 깊었다고 한다.

그럼 영조 전하는 아들 장지 좋은 데로 골라줬나? 흥. 아들 죽은 그 날 직접 지은 시호 '사도思悼' 내린 거 보면 뒤주에 가둬놓고 죽은 뒤 이름 짓고있던 거잖아@_@

아비 죽인 할배의 능을 효종 왕릉 파묘자리로 바꿔버린 정조 만분 이해한다. 능 자리 옮길 때 먼저 자리 정한 사람들이 안 다쳤길 바랄 뿐이지.

파묘한 자리라곤 해도, 어차피 남인들이 서인 잡으려고 어거지 비슷하게 옮긴 데니까 뭐 그리 흉지는 아니었을 거고.

 

이래 저래 다른 얘기는 크게 새로운 것은 없지만, 평소에 조선에 관심없는 사람이라면 간단하게 읽기 좋은 정도라 부담없다.

역시 다른 얘기보단, 능, 원, 묘에 대한 게 재미있다. 처음 들었으니까.

IOC위원장이었으면 좋았을 정종이라는 문구가 기억에 남고.

단종 시신 수습하고 오랜 세월 후손들까지 숨어지냈던 엄홍도와 단종 유배와 사사의 금부도사였던 왕방연은 뭐 늘 눈에 띄는 인물이고.

훈민정음 창제에 크게 기여한 것으로 보이지만 승려라고 실록에도 기록하지 않은 신미대사 이야기는 요즘 두 어번 읽은 터라 눈이 갔다.

아마도 세종의 지시에 따라, 전혀 흔적을 남기지 않은 걸로 보이는 어학의 천재 신미대사, 처음 알았다 --;.......

2권 49쪽에는 하는 일 없이 세월만 보내는 행위를 뜻하는 '어영부영'이 효종 대 어영청에서 유래했다는 얘기가 나온다.

 

이해가지 않는 건, 세종 능인 영릉이 처음에 있던 자리가 지금 국정원이라는데, 그 흔적 사진 찍는 것도 못하게 한다는 거.

들어가서 찍을 수 없는 건 이해하는데, 그러면 님아들이 찍어서 주면 되잖아요. 누군가는 그걸 보고 싶대잖아요.

 

뭔 넘의 명칭들이 읽을 때마다 헷갈린다. 제일 싫은 건 촌수 안 맞추고 겹사돈맺은 한명회.

셋째 딸은 세조 둘째 며느리, 넷째 딸은 세조 큰 아들 덕종 의경세자의 둘째 며느리(성종비 공혜왕후 한씨).

여기다가 덕종 의경세자 비가 소혜왕후(인수대비) 한씨라서 더 헷갈린다고--; 소혜왕후는 한확의 딸이라곤 하지만 그냥 보면 다 한 집안 출신 같아서.

 

머 암튼.  5월 첫 일요일은 종묘에서 대제가 있는 날이라는데,

올해는 한 번 구경가볼까.

 

 

그러나 역사에는 따뜻한 가정假定이 없다. 서늘한 교훈만 있을 뿐이다. - 2권 59쪽.

 

후회는 결코 앞서는 법이 없다. 맏아들 효장세자가 9세로 병사하자 영조는 시민당에서 곡을 하고, 세자궁의 집영문 밖까지 나왔다. 말년에는 사도세자를 죽인 것을 저리게 후회했다. 그러나 후회와 용서는 동의어가 아니다. - 2권 132쪽.

 

2권 156쪽, 부모님의 지중한 열 가지 은혜.

1. 회탐수호은懷耽守護恩 잉태하여 정성을 기울여 지켜주시는 은혜

2. 임산수고은臨産受苦恩 낳으실 때 고통을 이기시는 은혜

3. 생자망우은生子忘憂恩 자식을 낳고 모든 근심을 잊으시는 은혜

4. 인고토감은咽苦吐甘恩 쓴 것은 삼키시고 단 것만을 먹여주시는 은혜

5. 회건취습은廻乾就濕恩 마른 자리에 골라 눕혀주시고 진 자리에 누우시는 은혜

6. 유포양육은乳哺養育恩 때 맞춰 젖 먹여 길러주시는 은혜

7. 세탁부정은洗濯不淨恩 더러운 것은 깨끗하게 씻어주시는 은혜

8. 원행억념은遠行憶念恩 멀리 떠나면 염려해주시는 은혜

9. 위조악업은爲造惡業恩 자식을 위해 궂은 일도 마다하지 않아주시는 은혜

10. 구경연민은究竟憐愍恩 마침내 늙어돌아가시기까지 끝까지 염려해주시고 사랑해주시는 은혜.

 

 

1권 28쪽 위에서 10째줄 '빈전도감'의 한자 첫 글자 틀렸음.

 

2권 35쪽 2째줄 문장이 어색함. '불심으로 축조된 남한산성이 외교력의 부족과 국력이 허약하여 부끄러운 역사의 현장이 되어버렸다.'

 

2권 46쪽, 17대 효종 가계도에서 '인종'이라고 오타 있음. 효종의 아버지는 16대 인조. 그리고 32쪽 인조 가계도에는 효종을 넷째 아들이라고 하고, 여기서는 둘째 아들이라고 하고 있음.

'_2 > 읽다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징비록  (0) 2010.02.19
닥쳐라 일본인  (0) 2010.02.16
조일전쟁  (0) 2010.01.25
엽기 조선풍속사  (0) 2010.01.25
조선의 방외지사  (0) 2010.01.25